지난주 ‘회상’을 주제로 그 옛날 1970년대 시드니 한인사회에 대한 추억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참고로 국어사전은 회상(回想)을 “지난 날들의 추억이나 일들을 돌이켜(回) 생각함(想)”이라고 정의합니다. 

필자와 같은 1.5세대들이 부모님을 따라 시드니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한 시기는 대략 1970년대 중후반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 시드니 한인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오리지널(?) 1.5세들은 모두 197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온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1980년대 초반 대거 시드니에 있는 대학들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필자 역시도 이런 사례에 속하는 경우인데 그 당시 시드니에는 크게 ‘시드니대학’과 ‘NSW대학’ 그리고 ‘NSWIT’라는 공과대학이 있었습니다. 이 ‘NSWIT’라는 공과대학은 나중에 ‘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라는 명칭으로 탈바꿈을 합니다. 그 외 외곽으로는 ‘맥콰리대학’이 있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지금은 위에서 언급한 대학들 외에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대학들이 시드니에 분교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 당시 우리 부모님 세대 어르신들은 자녀들에게 무조건 ‘시드니대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지금이야 각자의 개성 및 전공에 따라 또 대학의 특성에 따라 자신의 분야를 택하는 경향이 크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무조건 ‘시드니대학’을 가라는 부모님들의 성화가 아직도 필자의 뇌리에 있습니다. 

아마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그렇게 생각하셨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서울에는 ‘서울대’가 최고라는 인식으로 시드니에는 ‘시드니대학’이 무조건 최고라는 인식을 갖고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물론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대학이 ‘시드니대학’이라는 점은 맞지만 그 당시 우리 부모님들이 갖고 계신 ‘시드니대학’의 위상(?)은 말로 표현이 어려울 정도라는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의 기억 속 ‘시드니대학’은 다를 수 있겠지만 최소한 제 주변의 모든 분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그 당시 한국계 재학생들이 가장 많은 대학도 ‘시드니대학’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비록 한국계라고는 하지만 호주에서 태어난 우리 2세 및 3세들의 경우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서 그런지 같은 한국계 학생들과 모이는 문화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최소한 필자의 자녀들만 보더라도 대학에서 같은 한국계 선후배와 모이는 모임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는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까까머리 중고등학생 시절 호주로 이민을 왔던 우리 1.5세대들의 경우 “함께 하는 선후배 문화”가 강해서 그랬는지 비록 호주에서 대학은 다녔지만 같이 공유하는 문화가 강했다는 기억이 지금도 있습니다. 

지난주 필자가 언급한 ‘라이카트’라는 지역의 한국계 나이트클럽 겸 식당인 ‘흑란’에서 대학축제 및 모임을 자주 가졌던 아련한 추억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시드니대학’에 다니던 학생들과 그 외 다른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을 모아 ‘연합대학’이라는 명칭으로 한국의 ‘연고전’과 같은 운동대회를 ‘맥콰리대학’에서 ‘시드니대학’과 ‘연합대학’이 1980년대 초중반 벌였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당시 또 잊을 수 없는 추억 중 하나가 1985년으로 기억을 하는데 지금의 ‘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즉 그 당시 ‘NSWIT’라 불리던 ‘NSW공대’에서 “젊음의 함성”이란 가요제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젊음의 함성”이란 가요제 사회를 필자가 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를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이제는 “공소시효”가 끝난 엄청난(?) 사건 하나를 후배들과 공모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당시 우승 후보는 NSW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이정현 군이 만든 ‘라비앙로즈’라는 밴드그룹이 음악성에서는 최고였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이정현 군은 훗날 한국에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로 많은 인기를 끌던 가수가 됩니다. 

하지만 그때 사회를 맡던 필자에게 ‘시드니대학’ 후배들이 어려운(?) 부탁 하나를 합니다. 자신들이 가르치고 만든 속성(?) 4인조 여성밴드인 ‘톰보이’라는 그룹을 최우수 인기상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사위원장을 섭외해야 했는데 지금은 작고하신 시드니대학의 J선배가 바로 심사위원장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누가 최우수(?) 인기상을 받았는지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 당시 “최우수 인기상”이라는 요상한 타이틀로 ‘대상’보다 더 크고 좋은 트로피를 받았던 상황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는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다 지나간 그 옛날의 추억이었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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